정진희

기성 언론은 미국의 전쟁이 탈레반 정권을 붕괴시킴으로써 아프간 여성이 해방됐다고 주장한다. 지난달 탈레반이 카불에서 퇴각한 뒤 언론들은 일제히 부르카를 벗는 아프간 여성의 모습을 크게 부각시켰다.

로라 부시와 셰리 블레어는 자기 남편들이 벌이는 전쟁의 동기가 여성 해방이라는 고결한 이상이라고 주장했다. 지난 달 로라 부시는 라디오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최근 아프가니스탄에서 거둔 많은 군사적 성공 때문에, 여성들은 더 이상 가정에 감금되지 않게 됐다.” “그들은 처벌의 두려움 없이 음악을 듣고 자신의 딸을 가르칠 수 있다. … 테러리즘에 맞선 투쟁은 여성의 권리와 존엄성을 위한 투쟁이기도 하다.”그러나 카불에서 미국의 “승리” 뒤에 찾아온 것은 결코 해방이 아니었다. 한 목격자는 미군 폭격기가 카불의 비비 마흐루 지역에서 2백30킬로그램의 폭탄을 떨어뜨렸다고 말했다. 굴 아흐마드는 희생자들 가운데 단지 한 명일 뿐이다. 카펫 제조공인 그의 아내 시마와 아들, 다섯 명의 딸들이 모두 폭격으로 숨졌다. “우리는 그들을 모두 묘지에 묻었어요. 우리는 그들 무덤 위에 각각 비석을 세웠지만 그들의 몸뚱이는 모두 갈기갈기 찢겨져 있었어요.” 아흐마드의 첫번째 아내 아라파의 말이다.

이렇게 미군의 폭격과 집속탄으로 온몸이 갈가리 찢겨 죽은 여성들의 수가 이루 헤아릴 수 없는데도 기성 언론은 아프간 여성이 부르카를 벗고 립스틱을 바르고 하이힐을 신게 됐다고 보도했다. 카불과 여타 도시의 많은 여성들이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갖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의 두려움 또한 크다. 부르카를 벗는 여성은 아직 소수다. <업저버>의 크리스 스티번 기자는 외국 사진 기자들이 여성들이 부르카를 벗는 대가로 돈을 줬는데 여성들은 사진을 찍고 나면 곧바로 다시 부르카를 착용했다고 말했다. 많은 여성들은 북부동맹이 아프가니스탄을 지배했던 1992∼1996년 동안 자행한 학살·강간·약탈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미국은 1990년대 중반 권력을 장악한 탈레반이 여성을 가혹하게 억압한다는  사실을 무시했던 것과 꼭 마찬가지로 북부동맹의 야만적 전력 역시 무시하고 있다. 미국이 여성 해방을 위해 전쟁을 벌이고 있다는 얘기는 사우디아라비아 여성들에겐 아주 놀라운 일일 것이다. 친미 국가인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여성들은 탈레반 치하 아프가니스탄 여성들과 마찬가지로 온 몸을 가리고 공공 활동이 제한된다. 탈레반의 종교 경찰은 사우디아라비아 왕가의 통치 스타일을 그대로 본뜬 것이다.

뿌리 깊은

기성 언론은 마치 아프가니스탄 여성 억압이 새로운 발견인 양 호들갑을 떨지만, 아프가니스탄 여성이 받아 온 고통은 탈레반이 통치한 5년보다 훨씬 더 오래됐다.

아프가니스탄 여성을 끔찍하게 억압해 온 많은 관습들과 탈레반은 수십 년에 걸친 전쟁과 경제 후퇴의 산물이다. 서방은 내전에서 여러 군벌들을 지원해 아프가니스탄을 황폐하게 만드는 데 가담했고 이번의 대규모 전쟁을 통해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 그래서 특히 아프가니스탄 여성들의 처지는 더욱 비참해졌다. 탈레반의 억압적 여성 정책은 “정통 이슬람”에 충실한 결과가 아니다. 이슬람 창시자 무함마드의 첫번째 아내인 카디자는 자기 명의로 된 재산을 가졌던 부유한 상인이었고 그녀의 딸 파티마는 이슬람에서 대단히 존경받았다.

7세기에 무함마드는 남녀 간의 관계를 포함해 사회 활동을 다스리는 규범을 세웠다. 그것은 그가 아라비아 반도에서 도전했던 지배 부족들이 여성과 가난한 사람과 이방인 들을 전제적으로 억압했던 것과 비교해 볼 때 진일보한 것이었다. 그것은 또한 이웃한 기독교 제국인 비잔티움에서 여성을 다루던 방식보다 나았다. 무함마드의 규범은 오늘날 선진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 대중이 획득한 제한된 자유와 평등에는 미치지 못한다. 그러나  여성을 인간이 아닌 존재로 격하시키지는 않았다. 오늘날 이슬람 국가들 사이에서도 여성의 지위는 다르다. 이란 여성은 차별당하고 공공 장소에서 머리에 베일을 써야 하지만, 그들은 일할 수 있고 투표할 수 있고 국회 의원이 되기도 한다. 이란 정부는 1996년에 탈레반의 여성 정책을 혹평했는데, 당시 카불의 이 새로운 통치자를 후원하고 있었던 세력은 바로 미국이었다. 모든 운동과 마찬가지로 탈레반을 이해하려면 그것을 낳은 사회를 이해해야 한다. 탈레반은 지난  사반세기 동안 아프가니스탄을 황폐하게 만들었던 전쟁이 없었더라면 등장할 수 없었을 것이다.

수십 년에 걸친 전쟁으로 약 2백만 명이 죽었다. 탈레반의 대부분은 사우디아라비아가 재정을 지원한 파키스탄 난민촌 내 이슬람 학교 마드라사를 다녔던 어린 고아들이었다. 그들은 수세기 동안 거의 변하지 않은 채 유지돼 온 촌락 출신들이었다. 중앙 아시아 전문가인 아메드 라시드는 최근 미국에서 베스트셀러가 된 뛰어난 책 ≪탈레반≫에서 이렇게 썼다. “탈레반 지도자들은 모두 가장 가난하고 가장 보수적이고 거의 문맹인 아프가니스탄의 파슈툰 남부 지방 출신이다. 탈레반 지도자 물라 오마르의 마을은 여성들이 항상 전신을 덮은 채 돌아다녔고 학교에 가는 소녀는 한 명도 없었는데, 왜냐하면 학교가 없었기 때문이다.”전쟁은 이러한 마을 출신 소년들을 난민촌으로 내몰았다. 남성들만 다니는 마드라사에서 그들은 자기 마을의 전통과 종교적 가르침을 겨우 깨우칠 수 있었다. 오늘날 아프가니스탄에서 영토를 서로 차지하려 애쓰는 경쟁 군벌들은 1994년에 권력을 잡았지만, 혼란만 가져왔다. 무장한 깡패들이 사람들을 잔혹하게 처벌하고 그들의 지도자들은 돈을 끌어모았다. 그래서 1996년 탈레반의 권력 장악은 많은 사람들에게 아프가니스탄의 혼란과 대학살, 그리고 몇 년 동안 계속돼 온 지긋지긋한 전쟁을 끝낼 수 있는 대안으로 보였다.

라시드는 이렇게 쓴다. “20년 동안 계속된 전쟁은 아프가니스탄 시민 사회를 파괴했고, 가혹한 경제 상황에서 그나마 중요한 안식처 구실을 했던 씨족 공동체와 가족 구조도 파괴했다.” 탈레반은 자신의 규범을 강요하는 게 나라에 질서를 가져올 수 있다고 믿었다. 탈레반이 강요했던 것 중에는 부르카나 여성의 공공 활동 금지는 물론 남성의 행동에 대한 엄격한  통제도 있었다. 라시드는 이렇게 쓴다. “오마르와 그의 동료들은 그들 자신의 환경, 여성에 대한 그들의 경험 또는 경험 부족을 사회 전체로 옮겨다 놓았다.” 그들은 정체된 시골 사회의 전통이 산산조각난 나라에 안정을 가져다 줄 것이라고 믿었다. 직접적인 동기가 있었다. 1990년대 초에 도시들을 장악한 북부동맹 전사들은 성인 여성과 소녀들을 강간했다. 이러한 강간은 현대 전쟁의 끔찍한 특징 가운데 하나다. 제2차세계대전 당시 동부 전선의 야만성에 자극받은 소련 군대는 1945년 베를린에 입성할 때 역사에서 가장 잔혹한 집단 강간을 자행했다. 탈레반 지도자들은 자신의 군대가 북부동맹처럼 행동할까 봐 두려워했다. 1990년대 아프가니스탄의 야만성은 이것을 피하려는 다른 야만적인 방식 ―여성에 대한 가장 엄격한 제약―을 낳았다. 이것이 탈레반의 여성 정책에 대한 변명이나 정당화가 될 수는 없지만, 탈레반 통치 하의 아프간 사회를 이해하는 데는 도움이 된다. 탈레반의 여성 정책은 탈레반을 낳은 사회의 물질적 조건과 분리될 수 없다.

 

여성 해방은 어떻게 가능한가?

이번 전쟁만큼 여성 해방의 구호가 더럽혀진 적도 없을 것이다. 부시는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를 폭격하기 위해 탈레반의 여성 억압을 구실삼았다. 미국의 주류 페미니스트들(상당수 우리 나라 페미니스트들이 우호적으로 언급한 페미니스트 머조리티를 포함해)의 전쟁 지지 노력은 서방의 위선에 날개를 달아 주었다. 탈레반의 카불 퇴각 이후 언론이 퍼뜨린 ‘해방되는 아프가니스탄 여성’의 이미지가 얼마나 강력했던지, 수전 조지 같은 저명한 반전·반자본주의 활동가조차 혼란을 느낄 정도였다. 그러나 진심으로 여성 해방을 바라는 사람이라면 서방의 거짓말에 조금도 흔들려선 안 된다. 그 동안 미국이 개입해 온 전쟁에서 여성들이 당한 야만적 대우를 분명히 기억할 필요가 있다. 베트남 전쟁 동안 미군들은 “이중 베테랑”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미군들이 민간인 여성을 죽이기 전에 강간했기 때문에 붙은 별명이었다. 1968년 미라이 학살로 죽은 사람은 적어도 4백 명이었는데, 대다수가 여성과 어린이들이었다. 이들은 집단 강간당한 뒤 학살당했다. 아프가니스탄 여성의 조건이 선진국 여성들이나 우리 나라 여성들보다는 못하지만, 제국주의의 개입이 아프가니스탄 여성의 삶을 개선할 수는 결코 없다. 여성 해방이나 다른 진정한 사회 변화는 위로부터 도입될 수 없다. “위로부터의 해방”은 가장 좋은 상황에서조차 실질적이고 지속적인 변화를 거의 가져오지 않는다. 그러나 사람들의 삶을 더욱 나쁘게 하는 방식으로 시도된다면 그것은 끔찍한 재앙을 낳는다.

이것이 1970년대 말 소련이 후원한 아프가니스탄 정부가 시도했던 방식이다. 그 결과 무자헤딘을 낳았던 일련의 반란이 일어났다. 1979년 소련의 침공에 맞서 처음으로 저항했던 사람들 가운데 하나가 여자 고등학교 학생들이었다. 아프가니스탄 여성의 해방은 무엇보다 거대한 물질적 진보를 이룩하고 가난한 여성 대중이 자신의 권리를 위해 싸울 수 있는 조건을 만드는 데 달려 있다. 이것은 아프가니스탄을 황폐하게 만드는 데에 일조한 모든 열강들이 해 온 것과는 정반대다. 아프가니스탄 여성이 다음과 같은 처지에 놓여 있는 지금, 어떻게 해방을 말할 수 있겠는가?

  • 10만 명 가운데 1천7백 명의 여성들이 출산 도중 사망한다. 이것은 세계에서 가장 높은 수치다.
  • 어떤 피임 도구도 없기 때문에 많은 여성들이 8명의 아이를 낳는다. 이 가운데 2명은 다섯 살이 되기 전에 죽는다.
  • 여성의 평균 수명은 약 45세다.

전쟁은 고통을 적어도 덜어 줄 사회적 유대를 갈기갈기 찢어 놓았다. 미국과 영국은 이에 대한 해결책을 제공하지 않는다. 대신 우리는 일부 여성이 부르카를 벗고 다닌다면 여성은 해방된다는 말을 듣고 있다. 그러나 남녀 간의 좀더 평등한 관계는 평범한 사람들이 권력을 갖고 있지 않고 경쟁 군벌들이 영토를 분할하는 사회에서 이뤄질 수 없다. 평등한 남녀 관계는 외부 세력이 위로부터 강요하는 방식으로 가능하지 않다. 아프가니스탄에서 남성과 여성의 자유로운 관계는 오직 아래로부터의 자유로운 발전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출처: 《월간 다함께》 8호. 2002-01-01